세월은 쏜 살 같이 흘러... 벌써 20년이 지나버렸군. 지구의 46억년 역사에 비하면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개인에게는 인생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긴 시간. "반만년 민족의 역사"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겠지만 해방 후의 60여년의 대한민국의 역사를 놓고 보면, 3분의 1에 해당하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그런 20년이 지났다.

20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세삼스럽게?

20년 전에 각인된 노래가 몇 곡 있다. 하나는, "그녀의 웃음소리 뿐", 이문세 형님의 노래. 그리고 나머지는... 누구의 노래가 아닌, 공중에 흩날리던... 그렇다. 배경음악. 바로 배경음악들이다.

그 해 봄, 보통은 조용함의 도시였던 나의 고향마저도 술렁였던, 그런 봄. 대체로 도시 가장자리의 조용한 주거 지역에 주로 살았었던 우리는 하필 그 무렵, 시내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어린 나에게는 알리지도 않은채 찾아온 '87년의 봄. 사건. 사건. 그리고 시위대, 최루가스. 큰 길과 꽤나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인한 취루가스가 온 시내에 떠돌아 다니던 그랬던 봄.


이런 저런 사연을 뒤로 하고 그 해 늦여름 쯤, 우리는 이사를 해야 했다. 좋아서 한 이사는 아니었기에 문세형님의 노래, 특히 "이대로~ 떠나야만 하는가~" 하는 후렴구는 가슴을 후비며 다가왔다. 그렇게 떠나온 곳이 기차역 옆 개발중인 주택가의 한 쪽. 기차 소리도 운치있고...


그리고 가을, 겨울, 대선. 내 인생 최초의 직선제 대선이 그 해 겨울에 치뤄졌다. 물론 중학생에게 투표권은 없었다. :-) 5공화국 군부독재를 몰아내고 드디어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는... 역사적 의미가 있었던 그 대선.

한참 선거전이 치뤄지던 그 때, 각 후보들은 전국을 돌며 "순회 공연"에 들어갔다. 공연? 실제로 그랬다. 후보자의 지지를 호소하는 연설에 앞서 연설보다 배는 긴 시간동안 각종 공연이 이어졌다. 연설을 들어주기 위해 동원된 인원들을 위한 것일까? 어디서 나왔는지 몰려든 할아버지 할머니의 수와 공연의 크기가 그 후보의 세(지지율이라기 보다는 동원력이랄까?)를 표현해주고 있었다. 중학생이 뭘 그렇게 아는척 하냐고? 바로 그 공연이 우리 집 옆의 "역전앞 광장"에서 열렸기 때문. 그 해, 재미있는 곳에 살았다. :-)

YS의 공연이 있던 날, 어김없이 어린 호기심은 "역전앞 광장"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충/격/에 빠지고 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80년 광주"의 사진을 접한 것. 백인의 사진도, 흑인의 사진도, 그렇다고 동물의 사진도 아니었다. 또렸하게 알아볼 수 있었던 우리 민족의 얼굴 또는... (이런 표현 죄송합니다만) 턱쪼가리. 그 날의 충격과 함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노래가 생겼는데, 그것이 YS 유세 지원을 위한 노래.

우리가 그대와 함께 있음에, 그대가 우리와 함께 있음에,

20년이 흐른 지금까지, 더 떠들석했던 (세를 떨쳤던) 노후보의 유세 지원 노래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노래만은... 아마도 그 사진이 세겨진 바로 옆에 사진의 배경음악으로 세겨져 있는 듯 하다. (이 글을 쓰면서도 살짝 떨린다.)

결국,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서인지 어째서인지, 여당의 후보가 당선이 되었었지. 그런데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변. 야권 후보였던 YS와 JP가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여당에 합류해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군부 종식, 독재 타도를 외치며 저 인간은 아니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


후... 철썩 같이 믿고만 있었던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가 이런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된 어렸던 그 시절이... 벌써 20년 전의 일로 멀어져 있다. 나의 기억 속에서도 점점 멀어지고 있으며 우리의 기억으로부터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가보다.

많이 변했다. 좋아진 것도 많고 여전한 것도 많고... 또 단지 바뀌기만 한 것도 있고...

그렇게 흘러 간다.


한국일보 : 대학생 10명 중 6명 "6·10항쟁 잘 모릅니다"

한국일보가 고려대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 서울지역 4개 대학 학보사와 함께 6월 민주화운동 20주년을 맞아 이들 대학 학생 1,089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4.1%만이 6월 항쟁에 대해 ‘알고 있다’(잘 알고 있다 7.5%, 대략 알고 있다 36.6%)고 답했다. 설문조사는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5월 17,18일 이틀 동안 이뤄졌고 표본오차는 +-2.9%, 신뢰구간은 95%다. 고(故)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희생과 군사독재 철폐, 민주주의 실현을 향한 전국민적 저항, 대통령 직 선제와 헌법 개정 쟁취 투쟁 등 1987년 6월의 대한민국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격렬했고 그 중심에는 대학생이 있었다. 그러나 20년이 흐른 2007년 대학생들은 6월 항쟁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6월 항쟁이 1987년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대학생은 10명 3명 뿐이었다. 10명 중 6명 가까이는 들어 본 정도(46.2%)이거나 들어본 적도 없다(9.7%)고 답했다.

한국일보 : 서울대·연대 "그날을 기억하자"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다” -밀란 쿤데라 1987년 6ㆍ10 민주항쟁 당시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웠던 상아탑이 항쟁 20주년을 맞아 “그날을 기억하자”며 망각과의 투쟁을 선포했다. 6ㆍ10 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고(故) 박종철, 이한열씨의 모교인 서울대와 연세대가 앞장섰다.